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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전략거점 32098 낙원


전략거점 32098 낙원

하세 사토시 지음, 김영종 옮김 (일러스트 없음)

개인적인 평점: ★★★☆☆ 3/5 [Average]




한 권짜리로 끝나는 라이트노벨은 '한 권'이라는 깔끔함 때문인지, 서점에서 마주치면 왠지 모르게 사고 싶어진다. 이 라이트노벨의 경우에도 작가고 내용이고 전혀 아는 바 없었지만, 신간들 중 단권으로 끝난다는 이유만으로 그냥 사 오게 되었다.

읽고 난 뒤의 감상평은... 그야말로 딱 중간? 기본적으로 나쁘지 않지만, 보통 이상을 넘어 '좋다', '재미있다'라고 말하기에는 평균 이상의 특별한 맛이 부족하다는 느낌이었다.


내용 자체는 굉장히 짧고 간결하다. 등장인물도 3명밖에 안 되고, 무대는 은하 한구석 어느 별의 일부로 한정되어 있다. 때문에 플롯이고 갈등이고 할 것도 그다지 명확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아서, 어깨 힘을 빼고 읽기에 편하다. 하지만 바로 그 '익숙하고 편안하다'는 점 때문에 약간 지루한 감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SF배경이라고는 하지만 딱히 그것이 깊이 있게 드러나는 것도 아니고, 스토리상에 반전이나 굴곡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도 사실 그다지 강한 반전은 아니다. 한창 싸우고 있던 병사가, 전쟁터에서 잠시 빠져나와 잃었던 인간성과 향수를 다시 성찰해본다는 이야기의 얼개 자체도 어떻게 보면 꽤나 고전적인 것이라 그다지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배경 묘사라던지 심리 묘사 같은 부분이 착실하게 잘 되어 있어서, 글을 읽는 맛이 있다는 것은 좋은 점이었다. 수백년간 계속되어 온 우주 전쟁에서 희생된 장병들의 넋이 우주 전함을 묘비삼아 쉬고 있는 조용한 행성과, 그 곳에서 영원히 어린아이인 채로 시신을 수습해 주면서 살아가는 소녀라는 설정도 감성적인 부분을 자극하는 구석이 있다. 머리로 꼼꼼하게 생각하면서 읽어야 할 소설이라기보다는 마음에 맡기고 정경을 상상하면서 천천히 읽어 갈 만한 소설이 아닌가 싶다.




전체적으로 보아 흔히 세간에서 '라이트노벨'이라고 부르는 소설이라기보다는, 어딘가의 SF단편집에 실린 단편 소설을 읽는 느낌이었다. 자극적이고 논쟁적이거나 고민거리를 던져 주는 소설을 찾는 분에게는 비추, 심신을 안정시켜 주는 치유계 소설을 원하시는 분에게는 추천.하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는, 돈 주고 사기에는 다소 미묘한 책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사실 치유계 컨셉의 작품을 찾는다면 이보다  더 좋은 것들도 얼마든지 있으니까.


[감상] 엔젤 하울링 1~10







<엔젤 하울링>

아키타 요시노부 지음, 시이나 유우 일러스트, 김영종 옮김

개인적인 평점 : ★★★★★ [5/5] (Superb) + a.







1.

  자신을 크게 감동시킨 무언가(소설이건 영화건 연극이건)에 대해 감상글을 써 보라고 하면,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나 고민이 생기는 경우가 있다. 나에게는 <엔젤 하울링>이 바로 그러한 것들 중 하나다. 말하자면 이 책 자체가 일종의 평가의 기준이 되어버려서, 도저히 어디부터 감상을 써 내려가야 할지 막막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 이 소설에 대해서 제대로 형식을 갖춘 감상문은 몇 년간 못 쓸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이제 연말도 되고 한 만큼, 올해 읽었던 책 중 내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는 이 책에 대해서 한 번 정리를 해 두고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잡스런 글이나마 써 보게 되었다.

여하튼지간에, 그냥 매우 간결하고 짧게 이 소설에 대해 나의 단상을 쓰면.... 거두절미하고 모든 라이트노벨 중 최고.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아마 미래에도 이것을 뛰어넘는 라이트노벨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2.

  -보통 라이트노벨은 어떤 명시적인 주제의식을 드러내려고 하기보다는 단지 매력적인 캐릭터와 스토리 자체를 드러내는 데 의의를 두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의외로 주제의식을 전면부에 드러내놓고 스토리를 진행해나가는 소설도 없지는 않은데, 그런 소설들 중 상당수는 큰 문제가 있는 작품들이었다. 그런 부류의 예를 들자면, 가령 시드노벨의 <정의소녀환상>이 있겠다. 제대로 된 갈등 구조의 부재, 문제에 대한 성급한 접근, 충분한 숙고와 성찰의 부족이라는 3박자가 맞물려 전형적인 프로파간다로 전락한 소설(이라고도 할 수 없겠지만)이다.

  하지만 <엔젤 하울링>은 상당히 견고한 주제의식을 내세우면서도, 그러한 프로파간다 부류 소설들의 조급함과는 정반대로 (때때로 답답함 느껴질 정도의) '신중함'으로 문제의 핵심에 다가가면서 천천히 주제를 드러내는 방법을 취했는데 이것이 매우 효과적이지 않았나 싶다. 자기 자신밖에 믿지 못하고 타인을 두려워하며 타인의 존재를 믿지 못하는 '미즈 비앙카', 그리고 제어할 수 없는 파괴의 힘 때문에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는 주변인 '프리우 하리스코' 두 사람의 여행을 천천히 따라가는 방식을 취하면서 작가의 말보다는 캐릭터들의 말과 행동, 그리고 캐릭터들의 성격의 변화를 통해 중심 주제를 한꺼풀씩 드러낸다. 덕분에 <엔젤 하울링>은 일방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여러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통해 설득력 있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소설 내의 사소한 설정들조차도 소설의 중심 주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 또한 매우 인상깊은 요소들 중 하나였다.
한 가지 일밖에 생각하지 못하고 한 가지 일밖에 하지 못하는 정령, 인간의 의식이 개념으로 포착한 것에 대해 물리적인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초능력인 염사, 객관적인 지식을 추구하면서도 바로 그 자세 때문에 그것에 영원히 닿지 못하는 신비 조사회,
대상을 관측할 뿐 무의미한 능력인 마기, 마음의 실존을 실증적으로 증명하라고 요구하면서 인간 삶의 모든 의미를 빼앗아버리는 아마와, 그 밖에도 이시칼리시아 하이엔드, 흑의, 이뫄시아가 가르치는 거리 등등...

모두 다 설정 자체로 매력적이면서도, 그 상징들이 소설의 중심 주제인 근대성과 도구적 합리성에 대한 비판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정말 대단했다. (덕분에 소설가가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 직업인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그 외에 작품의 문체라던가 서술의 분위기도 기억에 남았다. 기본적으로 3인칭 시점이지만, 칼이나 무기 같은 사소한 사물에 대한 설명을 통해서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것이 인상깊었다. 멸망 직전에 있는 세계에 대한 분위기의 서술이나 묘사도 뛰어나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미즈편의 '불', 그리고 프리우 편의 '얼음'으로 상징되는 색채의 대비에도 관심이 갔다. '불'을 다루는 도시인 이뫄시아와 '얼음'으로 가득찬 초화의 숲, '붉은 머리'인 미즈와 '백금발'인 프리우, '불꽃'으로 이루어진 기어와 '금속'으로 이루어진 울트프라이드 등등...




  3.


-흥행을 노리며 억지로 기존 범형에 끼워맞춘 캐릭터들, 부자연스럽게 쑤셔넣은 모에코드들, 일방적인 설교와 독단주의적인 도덕만을 내세우는 주인공들이 넘쳐나는 최근의 라이트노벨들 속에서 <엔젤 하울링>은 여러모로 굉장히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듯하다. '라이트노벨은 무조건적으로 가벼운 주제만을 다루어야만 한다'라는 이상한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에게 반론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몇 달 전 코맥 맥카시의 <로드>를 인상깊게 읽었다. 세상이 멸망한 뒤 아버지와 아들이 계속해서 길을 걸어가는 이야기를 그린 소설이었다. 그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오랫동안 아들을 헌신적으로 보살펴왔던 아버지가 죽는다. 아들은 슬퍼하면서 아버지의 시신을 뒤로 한 채 다시 길을 떠나지만, 이후에도 계속해서 죽은 아버지와 말을 하는 것으로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게 된다. 그 장면을 보면서 계속해서 <엔젤 하울링> 9권과 10권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최근 학교 수업시간에 읽게 된 다른 책들에서도 그와 비슷하게 '듣는 것'과 대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그래서 좋든 싫든 아직도 <엔젤 하울링>을 계속 생각하게 된다. 좋은 소설은 한 번 독서로 뇌리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 읽은 다음에도 지속적으로 기억에 남아 독자와 대화를 나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 말대로라면 <엔젤 하울링>은 적어도 내게는 굉장히 좋은 책이 아니었나 싶다.

-여하튼, 나도 계속해서 책도 많이 읽고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 같다. 나에게 이 책을 추천해 주신 그분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미즈와 프리우의 앞길에 언제까지나 목소리들이 함께하기를...


[감상] 성검의 블랙스미스 1~3




성검의 블랙스미스

(미우라 아사오 지음, 루나 일러스트, 김완 옮김)

개인적 평점: ★★☆☆☆ (2/5) [Poor]



  가끔 그냥 새로 출간된 소설이라면 아무거나 한번 사 보고 싶어지는 시기가 있다. 맨날 읽던 책만 읽으면 질리는 만큼, 작품의 질을 떠나서 그냥 전혀 읽어 보지 않은 작가의 새 책을 읽어보고 싶어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최근에 한번 읽어 본 것이 바로 이 <성검의 블랙스미스>였다. 작가에 대해 아는 바는 전혀 없었지만, 최근 라노베 업계에 범람하는 온갖 잡탕 장르와는 달리 비교적 전통적인 판타지 세계관에 충실하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또 이것 이외에도 여러가지 책('덤벼 시리즈'였던가?)을 냈다고 하니 나름대로 읽을 만하지 않을까 싶었다. 애니메이션화도 되었다고 하고...

  그렇게 구입하여 3권까지 읽어본 뒤의 감상은... 문자 그대로 그냥 '그저 그렇다' 정도? 불쏘시개, 졸작, 망작이라고 치부할 만큼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잘 썼다고 말하기에도 이것저것 헛점이 많이 보인다.



1권


  1권에서 주인공의 고뇌가 절정에 달한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은 세실리가 루크에게 무릎을 꿇고 힘을 빌려달라고 사정하는 장면일 것이다. 작가는 이 부분을 나름대로 강조하려고 했던 것 같지만... 독자로서 보기에는 '글쎄올시다'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가령 세실리 캠벨이라는 소녀가 언행이 진중하고 굉장히 진지한 성격이며, 귀족으로서의 프라이드가 몹시 강해서 평민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못 참는 성미라고 해 보자. 그리고 그런 부분이 이야기 속에서 지속적으로 설득력 있게 드러났고 그에 대해 독자들이 감정적으로 공감할 수 있었다면 아마 세실리가 루크에게 무릎을 꿇고 사정하는 장면은 큰 무게감을 지닐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떤가?
세실리의 전투 능력이 시원찮다는 사실 자체는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도리어 노력하는 보통 사람의 이야기가 더 큰 감동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니까. 하지만 진짜 문제는 세실리 자체가 너무나도 가볍게 그려져서, 캐릭터에게 '카리스마'라는 것이 전혀 생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루크에게 부탁하는 장면에서도 "아, 희생 정신이 대단하구나.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자존심도 굽힐 줄 알다니..."라는 감탄보다는 솔직히 "얘 참 들이대는 거 잘하네"라는 정도의 감상밖에는 들지 않는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세실리가 '허실리' 내지는 '허세리'라는 별명을 얻은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다못해 뭔가를 보여주고 나서 굽신굽신 거려야 조금이라도 감동이 있을 텐데 작가가 그런 장면을 보여주지 않으니, 평소에 허세부리다가 깨지니깐 굽신거리는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좀 하다 안 되니 쎈 놈한테 도움을 요청한다는 구도라면, 진구가 퉁퉁이한테 두들겨 맞고 돌아와 "도와줘 도라에몽~"하는 거나 다를 바 없다.


2권


  1권만큼은 아니지만 2권에서도 사정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2권의 중심 이야기라면 역시 제국 황녀의 망명소동에 대한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갈등이 심화되는 부분은 세실리 vs 여시종 3인방의 대결 장면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여기서도 그다지 세실리의 결의에 심정적으로 공감이 안 갔다.

  세실리와 시종들 간의 갈등 구도 자체는 매우 좋다.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명예를 추구할 것인가(시종들) 아니면 자유로운 삶(세실리)을 추구할 것인가? 매우 쉽지 않는 질문이고 이야기거리도 많다. 그런데 여기서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점은, 왜 하필 대화 방식이 갑자기 '전투'로 치달아야 했느냐 하는 점이다. =_=  우선 말로 충분히 설득하고, 입씨름도 해보고, 욕설까지 간 다음에 칼을 부딪쳐야 이야기가 살 텐데 어째 그냥 닥치고 칼싸움 ㄱㄱ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이야기 전개였다. [...] 칼싸움을 해도 좋지만 적어도 충분한 대화가 이루어진 뒤에야 그런 충돌이 의미가 있게 되지 않는가? 그러한 부분에서의 볼륨이 너무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현대인들의 시각에서 간과되고 있어서 그렇지, 냉병기가 전장의 주역일 무렵의 전투용 검은 현대의 총기만큼이나 조심스럽게 취급되는 물건이었다. 제대로 정비된 검에 조금이라도 베이면 최소 치명상이고 최대는 사망이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 마법 치료가 존재한다고는 해도, 기본적으로 주요 장기나 머리를 다치면 즉사하는 것은 매한가지일텐데 건물 하나를 박살낼 정도의 위력을 가진 기술로 설득을 하려고 했다니 후덜덜 [...] 실제로 한 사람은 심한 부상을 입기도 했고. 이건 마치 가출한 소녀를 집에 돌아가라고 설득하려고 러시안 룰렛을 동원한 꼴이 아닌가... 목숨 건지게 하려고 설득하는 건데 죽여버리면 무슨 소용이야 orz)


3권 - 성불구자가 되셨습니다 시크프리드 선생님(고자라니!)


  3권에서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역시 시그프리드의 세실리 성폭행 미수(..) 사건일 것이다. 다행히 시크프리드는 영문은 몰라도 성불구자"고자라니~"라서 본격 막장테크까지는 안 탔지만, 그래도 확실히 세실리가 크게 욕 보기는 했다. 하지만 과연 그 충격적인 사건이 '전체 이야기에서 뭔가 뚜렷한 의미를 가지는가?' 하고 반문을 해 본다면, 글쎄올시다?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다지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다. 물론 해당 폭행 장면의 묘사는 전연령 대상의 책 치고는 상당히 과격한 수준이다. 하지만 역시 너무나도 뜬금없다는 게 문제다.


  다른 블로거 분께서 쓰신 성검 3권의 감상글을 읽어보니, 그 장면의 고통을 통해 '세실리의 이상이 시험받고 또 핍박을 극복하면서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고 평하셨는데... 개인적으로는 약간 의견이 다르다. 그 때 시그프리드는 딱히 세실리 캠벨의 이상을 논리적으로 공격하거나 허점을 찔러 괴롭힌 것이 아니라, 그저 무방비 상태의 여성을 습격해서 쓰러뜨리고 두들겨 팬 것 정도로 보이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인상깊은 장면은 아니었다.

 
사실 당시 시그프리드의 모습은 명백한 악의를 가진 카리스마적인 악당의 모습이라기보다는, 단순히 정신병자 내지는 공격적인 마약중독자(...)의 행태로밖에는 안 보인다. 카리스마적인 악역이 되고자 한다면 세실리의 약점을 좀 더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고 갑자기 꼭지가 돌아서 미친 짓을 벌이니 개인적으로는 그냥 세실리가 갑자기 왠 미친놈 때문에 봉변을 당했다 정도로밖에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 정도의 사건으로는, 세실리 개인의 의지력은 검증될지언정 진정한 의미에서의 이상은 제련되지 않는다.

  제대로 주인공의 이상을 욕보이고 엿먹이고자 하는 악역이라면, 단순히 힘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는 한참 부족하다. 도리어 힘은 주인공보다 더 약하더라도, 주인공의 윤리적인 헛점과 모순을 파고들어 괴롭혀야 진정한 악역이 될 수 있다. 가령 영화 <다크 나이트>의 조커가 그 예다. 조커는 딱히 배트맨보다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힘이 센 것도 아니지만 배트맨이 내세우는 이상론의 모든 헛점을 파악하고 집요하게 공격하는 것으로 배트맨을 거의 극한까지 몰고 간다. 모든 악역 캐릭터가 조커 수준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이상론을 내세우는 주인공에 반하는 악역이라면 단순히 힘뿐만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주인공과 맞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그프리드는 싸움 잘 하고 음험하긴 해도 그런 부분에서는 영 꽝이다. 그래서 기껏 강간 미수라는 대사건까지 벌여놓고서도 그닥 '카리스마'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냥 사회부적격 싸이코처럼 보일 뿐...

ㅉㅉ... 겨우 이지모드 세실리 정도도 말빨로 제압을 못 하다니 그래서야 어디가서 악역 캐릭터 명함이나 내밀겠니 시그프리드?


캐릭터

  어째 나쁜 점만 길게 써 놓은 것 같지만 캐릭터의 경우에는 나름대로 마음에 드는 측면도 있었다. 특히 주요 인물들인 세실리와 루크, 아리아, 리사 모두가 깊은 우정(&사랑)으로 맺어져 있다는 점이 상당히 인상깊었다. 세실리와 루크는 동료이자 예비 연인(?), 세실리와 아리아는 동료이자 친구, 아리아와 리사는 둘 다 악마라는 동병상련의 동지, 그리고 루크와 리사는 옛 연인의 재현이라는 고리로 각자가 튼튼하게 묶여 있어서 이런 측면에서는 상당히 괜찮은 듯했다.




사족: 도검 부분

  성검의 블랙스미스를 보면서 나름대로 신선했던 것이, 중세의 도검이나 검술에 대한 언급이 상당히 자세히 나온다는 점이었다. 개인적으로 중세/근세 무기 체계나 전술에 관심이 있는지라(관심이 있을 뿐 많이 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라이트노벨에 이런 부분이 자세히 언급된다는 것은 놀랍고 또 매우 좋았다. 하지만 그런 부분을 전면에 내세운 소설치고는 그 고증이나 현실성을 보면 그닥... =_=

  화약 병기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인데도 전투병들이 다들 몸의 일부만 가리는 경장 갑옷만 입고 다닌다는 점은 반드시 설정상의 설명이 필요한 부분인 듯하고, 냉병기가 주요 무기로 사용되고 있는 사회라면 당연히 품질이 좋은 단조 칼에 대한 수요도 상당히 있을 것인데 교역도시의 대장간들에선 주조로만 칼을 만든다는 것도 아리송하다. 그리고 여기저기의 게시판에서 많이들 지적하시는 것처럼, 일본뿐 아니라 서양쪽에도 접쇠공정은 존재했다(패턴웰디드). 물론 일본도가 전투용으로 상당히 뛰어나고 아름다운 칼이라는 이야기가 틀린 것만은 아니다. 그렇지만 분명 만능의 무기는 아닐 것인데 작중에서 무슨 '엄청나게 진귀한 보물' 취급을 받는 걸 보면 슬그머니 웃음이 나오면서도 또 씁쓸하기도 하다.

  그리고 2권에서 황녀의 시종들이 들고 나온 무기들을 보니 딱 작가가 무슨 책을 참고했을지 감이 왔다.





딴 건 그렇다 쳐도 페넬로페의 '발록 나이프'를 보니 감이 딱... =_=

그나저나 위 책에 따르면 '발록(Ballock)'이라는 단어의 뜻은 불X(즉 남자 다리 사이의 그것)이라고 하던데, 예쁘장한 아가씨가 그런 무기를 휘두르며 위풍당당하게 "이건 나의 마검 '발록불알 나이프'다!" 하는 장면을 보면 대체 뭐라고 반응을 해야 하나...










총평

여하튼 결론적으로, 졸작이라고 하면 지나치게 가혹한 평가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매우 재미있지도 않았다. 특히 이야기 전개가 지나치게 비약적으로 흐르는 장면에서는 등장인물들에게 몰입하는 것이 꽤나 힘들었다. 문체도 딱히 입맞에 맞는 것 같지 않고, 작품의 질을 떠나 개인적인 취향에도 그다지 부합하는 것 같지 않다. 일단 3권까지 구입은 했지만 이후로 더 구입하게 될 일은 없을 듯하다.










3년 RPG

근 3년동안 ORPG라는 놀이에 매달려 살았다. 처음 시작했을 때는 굉장히 재미있었다. 난생처음 밤도 새 보고, 새 캠페인이 시작되어 캐릭터 만들 때는 항상 설레였고, 주사위 한 번 굴릴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다.

근데 결국 이제 와서 되돌아보면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_=

-플레이어로서 느낌이 괜찮았던 캠페인은, 거의 모두가 다 당시 마스터의 사정 혹은 플레이어들의 문제로 도중폭파되었다. 전부가 완결은커녕 중반까지도 도달 못했다.

-마스터링을 처음으로 해보았던 캠페인 또한 본인의 미숙함으로 인해 2년 정도 지속되다 종결되었다. (당시 참가하셨던 플레이어 분들께는 그저 죄송할 따름이다)

-(프리스탭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완결을 본 플레이인 최근의 어떤 캠페인은 솔직히 말해 그다지 재미있지도 즐겁지도 않았다. 출석체크해서 주사위 굴리는 기계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기분이 참...

-현재 바깥에서 플레이하고 있는 겁스 캠페인은 마스터는 성실하지만 타 플레이어들이 그닥 플레이에 관심도 열정도 없어 보인다.

-마지막으로 여지껏 해온 RPG 결산이라도 해보고자 연 마스터링 캠페인은 몇주가 지나도록 시트조차 다 올라오지 않았다. 캠페인이 한두달 정도라도 지속될 수 있을지조차 모르겠다.




3년 전에 읽었던, 다른 캠페인의 흥미진진한 리플레이(여왕의 목걸이, 이클립스 등등)들을 보면서 "언젠가 저런 캠페인의 플레이어를 한번 정도라도 해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는 바람으로 나름대로 기대감을 갖고 열심히 했지만 이제 내게 남은 건 다 스러져가는 천막과 닳아 빠진 뼈다귀 조각들뿐이다. 이제 RPG를 버리고 새로운 정착지를 찾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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